‘낙태권’ 찾아 유럽 여행 다녀온 여성들
‘낙태권’ 찾아 유럽 여행 다녀온 여성들 “낙태는 살인이 아니라 생명…여성들이 안전하게 향유할 권리”
“한국 상황, 1960년대 금기와 처벌 심하던 프랑스와 비슷”
아일랜드에선 지난 5월 국민투표로 결국 ‘낙태죄 폐지’
가장 열악한 폴란드, 2016년 ‘10만 시위’로 조금씩 변화
낙태가 불법이었다가 합법화됐거나 한국처럼 현재 낙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유럽의 5개 국가를 여행한 후 <유럽낙태여행>이란 책을 낸 저자들이 4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카페 앞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우유니게(27), 이민경(26), 이두루(30), 정혜윤씨(26)
낙태가 불법이었다가 합법화됐거나 한국처럼 현재 낙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유럽의 5개 국가를 여행한 후 <유럽낙태여행>이란 책을 낸 저자들이 4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카페 앞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우유니게(27), 이민경(26), 이두루(30), 정혜윤씨(26)
“이왕 유럽 가는 거 레베카 곰퍼츠(낙태약 제공 국제단체 ‘위민온웨이브’(Women on waves) 대표)를 만날까?” 지난해 8월 어느 날 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허름한 호텔방.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 팀원 우유니게(27)·이두루(30)·이민경(26)·정혜윤(26)씨가 다음 여행지를 고민하다 떠올린 것은 ‘유럽 명품여행’도 아닌 ‘유럽 낙태여행’. 유럽의 여성운동가들을 만나자고 뜻을 모았다.
술자리에서 단박에 합의를 마친 이들은 가방을 싸고 비행기에 올랐다. 1월 말에서 2월 말까지 유럽 5개국을 돌아다녔다. 낙태 규제법이 한국보다 강한 나라, 낙태 수술이 합법인 나라 등 여러 환경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군분투하는 여성단체 활동가들을 만난 후 지난달 인터뷰와 여행기를 담은 책 <유럽낙태여행>을 펴냈다.
각국의 정치·사회·종교 환경은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국가가 낙태정책으로 여성 몸을 통제하려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여성의 몸을 국가나 정부, 남성이 통제하려 해선 안된다는 활동가들의 외침을 되새기고 한국에 돌아왔다.
가장 먼저 떠난 나라는 프랑스다. 가톨릭이 뿌리 깊은 이 나라는 1960년대 피임까지 죄로 처벌했다. ‘68혁명’ 전후 피임죄를 없애야 한다는 논의를 시작해 폐지를 이뤄냈다. 여성 운동가들의 강렬한 운동으로 1975년 낙태죄마저 폐지했다. 이민경씨는 4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지금 한국 상황이 1960~1970년대 금기와 처벌, 투쟁이 벌어진 프랑스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 팀원들인 우유니게, 이두루, 정혜윤, 이민경씨(왼쪽부터)가 2월 수정헌법 8조 폐지를 위한 길거리 캠페인 중인 아일랜드 활동가들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네번째로 향한 루마니아는 과거 낙태와 피임이 전면 불법이었다. 1970~1980년대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의 낙태 금지 정책으로 수많은 여성이 비위생적인 낙태 수술을 받다 숨졌고, 원치 않은 출산 탓에 고아가 많이 생겼다. 이두루씨는 “국가가 낙태를 엄격하게 통제했을 때 얼마나 상황이 끔찍해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나라였다”고 떠올렸다. 루마니아는 낙태는 합법이지만 현재 성교육과 피임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여러 문제를 겪고 있다.
마지막 여행지 폴란드는 낙태 여성에게 가장 열악한 유럽국가이다. 이곳도 한국과 상황이 비슷했다. 이두루씨가 말했다. “처음엔 폴란드에서 ‘검은 시위’를 했다는 것밖에 몰랐어요. 가보니 우리나라와 낙태 관련 법이 굉장히 비슷했어요. 하지만 좀 더 좋지 않은 게 낙태는 물론이고 피임조차도 죄라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하지만 2016년 여성 10만명이 거리에 모여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검은 시위’를 통해 상황이 조금씩 변화하는 분위기다. 이두루씨는 “보수정당이 낙태 전면 금지화를 추진하고 진보정당은 힘이 없는 데다 낙태를 죄악시하는 가톨릭 문화가 뿌리 깊어 투쟁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활동가들의 결기가 매우 강해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 “낙태는 살인이 아닌 생명이다”
한국 정부는 최근 불법 낙태 수술을 ‘비도덕적 의료 행위’로 규정했고, 산부인과 의사들은 ‘불법 낙태 파업’을 선언했다. 낙태는 여전히 불온하고 해선 안될 것으로 취급된다. 이들이 펴낸 책 <유럽낙태여행> 역시 출판 한 달 만에 수난을 당하고 있다. 일부 남성들이 서점에서 책을 훼손하거나 훔치고 있다. 우유니게씨는 “낙태라는 단어를 ‘유럽’ ‘여행’과 같은 밝은 단어와 같이 쓴 것 자체에 남성들이 큰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다”면서 “책 표지에 낙태라는 단어도 크게 적혀 있으니 ‘내가 아는 낙태가 맞나’라며 아리송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낙태가 우리 사회에서 터부시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낙태가 여행처럼 여성이라면 누구나 안전하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돼야 한다고 본다. 낙태는 반대론자들이 말하는 ‘살인’이 아니라 ‘생명’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두루씨가 말했다. “낙태가 가능해질 때 출산율도 높아질 수 있어요. 낙태가 합법화되면 책임질 수 있는 환경에서 원하는 때에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까요. 태아의 생명을 말하기 전에 태어날 아이의 훨씬 더 긴 생명과 여성의 생명을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책 표지 제목 위에는 ‘Journey for Life’(생명을 향한 여행)라는 부제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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